2008년 8월 23일 토요일

만 년 후를 준비한다는 것

"(원자력 에너지는) 화석 연료는 아니지만 매장량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분류된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1만 년' 이상 방사성을 띠기 때문에 처리하는 일이 극히 어렵고 위험할 뿐더러 처리 과정에서도 부수적인 환경 문제가 발생한다."

이 지적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덧붙이자면, 원자력 에너지로 상업 발전을 시작한 지 무려 50년이 지났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일부 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한국·중국·인도를 제외하고는 원자력 발전소 확대를 쉽게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을 일찍부터 준비해온 스웨덴의 상황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골칫거리인지 잘 알 수 있다. 스웨덴의 과학자들이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을 설치하면서 고심하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위험 경고'를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이다. 오랜 시간을 외부와 격리해야 하는 이 처리장에 현재 언어로 "위험하다"고 써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강양구, "MB氏, 녹색 타령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해!", 프레시안 에서
강조는 제가 붙인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원자력이란 최소한 만 년 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죠. 원자력이라는 게 나름 이점이 있으면서도 쉽사리 '환경친화적'이란 수식어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가까운 미래의 전력수요를 위해 먼 미래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 아무리 봐도 이건 지속가능성의 정의와는 상반되죠. 그래도 그래야만 한다면 최소한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죠. 한데, 우리네의 '원자력 르네상스', 이런 식으로 잘 준비되고 있는 걸까요?

기술적인 쪽은 일단 빼고, 여기서는 강양구 아저씨가 소개한 스웨덴 기술자들의 고민을 조금만 확장해 볼께요. 만 년 후에 우리네의 언어가 아직 그대로 있을꺼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전에 만 년 후에도 지워지지 않을 경고표시는 어떤 방식으로 그려야 할까요? 만 년 후에도 읽을 수 있게 하려면 원자력발전소 매뉴얼은 어떤 형태로 어떤 재질의 미디어에 저장되어야 할까요?

우연인데, 맥락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요. '긴 현재 (Long Now)' 재단이라고 말입니다. 일단 이 양반들은 만 년을 준비한다면 우리네 달력 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올해는 그러니까 2008년이 아니라 02008년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와 더불어 긴 현재를 대비하는 프로젝트들을 하나 씩 둘 씩 찾아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만 년을 견디는 시계 프로젝트가 있죠. 만 년을 견딜만한 장소를 찾아서 그 위에 만 년을 견디도록 설계된 시계를 놓는 거죠. 이 시계는 최근 SF작가 닐 스테픈슨의 새 작품 [Anathem]영감을 주었다고 해서 또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이 시계, 아날로그에요. 아직 우리가 아는 디지털 미디어중에 만 년을 견딜만한 게 없다고.

중성지로 만든 종이책의 수명은 대략 1,000년쯤, 잘 보존해도 2,000년쯤이 한계라고 합니다. CD나 DVD는? 100년을 넘기기 어렵다고들 합디다. 그냥 집에서 굽는 CD의 수명은 2~5년이라는 말도 있었고. 게다가 디지털 미디어에서는 계속 표준이 바뀌니까요. 미디어가 보존되었다고 하더라도 플레이어가 없어서 보거나 들을 수가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죠. 표준전쟁에서 패배해 사그러져간 비디오 베타 표준이 좋은 예겠죠. (이걸 한 눈에 볼 수 있는 게, 1960년 판 [The Time Machine]이었죠. 미래에 간 주인공이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지는 책 때문에 절망하는 장면과, 손으로 고리를 돌리면 재생되는 미디어로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 장면에서 처럼.)

'긴 현재' 재단은 이런 기록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안도 준비해왔습니다. 10년 전에 시작된 이네들의 작업은 중간에 로제타 프로젝트란 이름을 얻었죠. 세계의 언어를 모아 디스크에 수록하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바로 얼마 전에야 나왔어요.


로제타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지름 7.5cm 정도의 로제타 디스크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게 디스크의 뒷 면이에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8개의 언어로 "Languages of the World: This is an archive of over 1,500 human languages assembled in the year 02008 C.E. Magnify 1,000 times to find over 13,000 pages of language documentation."란 말을 새겨놓았습니다. 글자가 중앙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줄어드는 게 디자인은 그냥 멋이 아니라 로제타 프로젝트를 읽는 법을 알려주는 힌트입니다. 확대해서 보면 된다는 거죠.

로제타 디스크에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로, 다시 말해 우리가 바로 읽을 수 있는 페이지들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절을 1,500여개의 언어로 번역한 13,500여 장의 자료가 디스크 한 면에 새겨져 있어요. 750x 현미경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고 합니다. 디스크의 수명은 최장 만 년까지 연장될 수 있지만, 이네들은 2,000년을 일반 수명으로 간주하고 있어요. 또한 LOCKS (Lots of Copies Keep ‘em Safe) 원칙에 따라 몇 개의 카피를 더 만들어 세계 곳곳에 보관할 계획도 진행중이구요.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네들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첫 로제타 디스크는 2004년 ESA(European Space Agency)가 발사한 로제타 우주 탐사선에 실렸다고 하네요. 이 탐사선 2014년에 한 헤성에 내리앉을 예정인데, 임무를 마치면 계속 혜성과 함께 태양을 돌 것이라고.)

그러니까, 만 년 후, 혹은 몇 천 년 후를 준비하는 일은 뭐 하나만 해도 저렇듯 어려운 것이더란 말입니다. 기술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면도 만 년 후에는 참 많은 것들이 달려져 있을테니 말이에요. 한 면에 8개의 언어를 골라 수록한 이유도 적어도 저 8개 언어 중 하나는 천 년, 만 년 후에도 살아 남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준비한 거죠. 보장은 없지만.

많이 돌아왔지만, 만 년 후를 준비한 다는 건 '언어'라는 것 하나 만으로도 생각할 게 참 많은 일이더라는 겁니다. '긴 현재' 재단 아저씨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 원자력 폐기물 처리장에서 여러 언어로 위험을 표기해야 맞겠죠. 몇 천 년 후에도 최소한의 기술로 읽을 수 있을 미디어를 같이 준비해 놓고 말입니다. 웬지 그 때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적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하네요. 당장 급한 일만 서둘러 일단 일이 되도록 한다... 는 식의 발상에서 녹색성장이 자리잡긴 어렵죠.

1973년에 덴마크는 중동에서 99%의 에너지를 수입했습니다. 그러다 오일파동을 겪으면서 자국의 에너지 구조를 급속하게 바꿔 나갔죠. 현재 덴마크는 중동에서 전혀 에너지를 수입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체 에너지 생산의 20%가 풍력이고, 청정 에너지 기술은 최근 덴마크의 주요 수출 업종으로 급부상했죠. 선택의 문제에요. 그리고 그 선택은 선택의 기간을 얼마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다시 묻죠. 만 년의 시간을 두고 생각했을 때 우리네의 '원자력 르레상스' 잘 준비되고 있는 걸까요? 아니 그 전에 꼭 필요한 것일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